리강철(李鋼哲)씨는 중국 길림성 연길현에서 태어난 조선족으로 북경의 중앙민족대학에서 철학, 대학원에서 공산당의 건설에 관하여 공부, 中國工運學院에서 노동조합에 대해 가르쳤었다. 8형제중의 막내로 시골에서 가난한 살림이었으나 일본어를 독학했고 대학과 대학원에서 영어와 러시아어를 공부했다. 그러던 중 1986년 호요방 당총서기 실각, 1989년 천안문사건 등으로 예측 불가능한 중국 정치에 회의를 느꼈다. 또한 대학원에서의 연구 제한, 학생운동의 진압, 교육 방침의 변경 등 인텔리들의 충격은 적지 않은 것이었다. 적지 않은 나이에 중국에서의 '자리'도 버리고 일본으로 건너와 일본어학교부터 다시 다니기 시작했다. "일본을 통해서 세계를 보자"라는 생각했다. 물론 다른 학생들처럼 심야 아르바이트도 해가며 학교를 다녔다. 立敎대학에서 경제학(동북아시아 개발 연구)을 전공하고 지금은 일본 생활 13년째를 맞고 있다. 조선족의 의미는 중국에서 태어나 우리의 조국은 중국이라는 교육을 받았지만 문화적, 민족적으로는 조선인, 조선족의 피를 물려받은 의미라고 한다. 중국은 미국이나 호주처럼 다민족국가라 조선족이라 해서 받은 불평등은 없다고 한다.
중국 조선족의 대이동
90년대 이후 동북아시아의 국제 환경은 급속히 변화해 중국의 대외개혁, 개방과 시장경제의 가속화는 중국 조선족 사회에 큰 영향을 불러 일으켜 바다를 넘어 한국,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여러 곳으로 조선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다. 현재 일본에 있는 조선족은 수만 명을 넘고 있다. 유학생, 취학생, IT 기술자들, 교육·연수자들, 노동자, 투자 경영자 등 일본의 여러 분야에서 활약을 하고 있다. 그들은 일본에서 활약함과 동시에 중국, 남한, 북한을 비롯하여 구미지역까지 폭넓은 네트워크를 가지고 3개국(중국, 한국, 일본)의 언어와 문화를 가진 장점을 살려 동북아시아 지역의 협력과 평화 발전에 기여하고 있다.
리강철씨의 그간의 업적을 살펴보면 1995년 일본 재류의 중국조선족의 「교류, 협력, 공동발전」을 목적으로 설립된 비영리·민간 국제교류단체 天池協會의 부회장으로 활약하고 있고 2002년 6월의 동경재단의 연구원으로 실시한 -「동북아시아 개발은행」의 창설과 일본의 협력정책에 관한 조사연구 프로젝트 - 이는 아시아개발은행, 歐洲부흥개발은행 및 중국, 한국, 북한, 러시아 등에 대한 현지 조사에 의해 「동북아시아개발은행」의 창설을 위한 여러 조건을 제시하여 동북아시아에 있어서의 평화공존과 공영을 목적으로 동북아시아지역의 개발에 대한 일본의 협력정책에 관하여 구체적인 제안서를 작성한 것이다. 일본을 비롯한 관계국들의 정책 논의를 환기시켜 「동북아시아개발은행」의 창설을 실현화를 기한 것이었다. 2002년 이 프로젝트는 후쿠다 관방장관을 만나 일본 고이즈미 수상에게 정책 제안으로 전달되었다.
동북아시아발전을 위한 인재개발 양성
그 가 일본에 올 당시만 해도 냉전시대여서 동북아시아라는 개념조차 없었다고 한다. 한국의 노무현 대통령 정부의 10대 국정운영과제에 포함된 "동북아 중심 국가 건설"에 을 계기로 그의 활동은 더더욱 바빠지고 있다. 북한에서의 4·15행사 참가, 한국에서의 동북아시아 머셜플랜 심포지엄에도 참가하는 등 바쁜 일정을 보내고 있다. 그가 바라는 것은 국적에 얽매이지 않고 국경과 민족을 넘은 "아시아인"이라는 키워드이다. 해서 2002년 11월 발족시킨 것이 <신세기 아시아인개발연구센터>이다. 국제적인 인재교류 프로그램을 활발히 움직여 진정한 아시안을 키워내고자 한다. 일본에 있는 코리안들의 네트워크를 만들고 있다. 일본에 있는 조선족은 남과 북 모두 대화할 수 있으므로 그 강점을 살리고 있는 것이다. 이를 기초로 재일코리안 집단과 재일 챠이니즈 집단을 연결시킬 수 있는 채널을 만들고자 하는 것이 그의 당면 계획이다. 자신조차도 어느 나라 사람인지 모르게 되어 스스로 아시아인이라고 부르고 있다고 말할 정도로 다방면에서 굵직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그의 어깨에서 동북아시아의 미래와 번영의 작은 실마리가 조금씩 조금씩 풀려나가고 있다.
월간아리랑(http://www.arirang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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